
저자 초대석(김성백)
슬픔과 상흔을 붙잡는 몸짓 언어,
시집 『그늘흔』 출간한 김성백 시인
-본인 소개
반갑습니다. 저는 시를 쓰는 김성백이라고 합니다. 글을 쓰고 사진을 찍고 그림을 그리고 음악을 듣고 영화를 보는 것을 즐겨합니다.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일이 전부인 셈이죠. 영상업계에서 20년 가량 연출감독으로 일했고 은퇴 후 이런저런 일을 하다가, 지금은 아버님 간병을 돕고 있습니다.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했지만 시를 쓰게 된 것은 2016년 봄의 일입니다. 도서관에서 우연히 나태주 시인의 에세이 『죽기 전에 詩 한 편 쓰고 싶다』를 읽게 되면서, ‘그래 나도 시집 한 권 내보자’라는 생각으로 두어 달 만에 200여 편의 시를 썼고 이듬해 『당신 하나 건졌네』라는 제목의 시집을 출간해 지인들과 함께 나누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시를 전혀 몰랐기에 치기어린 마음의 추억 쌓기로 만족했지요. 그런데 독자들이 하나둘 생겨나 제 시를 블로그에 소개해주시고 지하철 역사 스크린도어에 표제시, 「당신 하나 건졌네」가 전시되면서, 시를 제대로 배워보고 싶은 욕심이 생겼습니다. 이후 독학으로 시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시집 <그늘흔> 소개
『그늘흔』은 제 마음속 깊은 그늘을 오래 헤맸던 기억과 그 상흔을 언어로 붙잡아 보려는 몸짓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저는 9년이라는 시간을 흐릿한 기척과 더불어 살아왔지요. 그 시간 동안, 저는 스스로의 그늘과 마주하며 언젠가는 이 마음을 고요히 풀어놓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늘흔』의 ‘그늘’은 단지 빛이 닿지 않는 어둠의 자리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애써 외면해 온 상처와 사라진 존재들의 자리이며, 잊힌 이름들의 숨결이 깃든 자리입니다. 그 그늘에 남겨진 작은 흔적들, 언젠가 누군가의 온기였던 그 자국들을 시로 재현하고 싶었습니다. 저에게 이 시집은 애도의 시집이지요. 故 채수근 상병의 죽음을 접하며 저는 한 사람의 죽음이 결코 개인의 몫으로만 남지 않는다는 사실을 뼈아프게 느꼈고 8개월여 고치고 고친 끝에 시, 「잉여숨」을 낳았습니다. 청년의 죽음 앞에서 언어는 무력하였지만, 바로 그 무력함을 끌어안고 시를 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시집 『그늘흔』은 그렇게 상처 입고 쓰러져간 이들을 향한 작은 기도의 마음, 그리고 살아남은 자로서의 윤리적 책무를 담아낸 시집입니다. 저는 이 시집이 슬픔과 애도의 자리에 잠시나마 독자 여러분을 머물게 할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시집 출간 동기
계간 문예지, 《시현실》에서 신인 시인상을 받은 후 6년 동안 써온 시를 두 권 분량의 시집으로 정리했고, 그 첫 번째 결과물이 바로 올해 6월에 나온 『그늘흔』입니다. 작년 3월에 제14회 조영관문학창작기금을 받은 이력이 이번 시집을 내는 데 큰 도움이 되었지요. 예정대로라면 이른 봄에 출간되었을 것인데, 정치적 격변을 겪으며 3개월여 늦게 발간되었습니다. 서정적 리얼리즘에 준하는 시들을 선별해 시집을 구성했습니다. 은퇴 후, 충남 금산의 한 농촌체험마을에서 사무장으로 1년 일했던 경험과 물류업체에서 2년간 비정규직으로 일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노동자와 서민의 삶을 진솔하게 담아내려고 노력했습니다. 또한 사회적 약자와 소외계층, 저와 가족의 고단한 일상을 차분히 응시하여 얻은 심상 역시 담겨있습니다.
-독자 팁
이 시집은 바깥의 상처만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저 또한 존재의 틈과 부서진 자리를 스스로에게 묻고자 했습니다. 단추와 구멍, 얼굴과 거울 같은 시어들은 그러한 질문의 다른 이름입니다. 시인은 언어로 어둠을 더듬으며 그 안에서 스스로의 허물과도 화해하고자 합니다. 결국 『그늘흔』은 그늘에 남겨진 온기와 윤리 그리고 존재의 슬픔과 고요한 환희를 독자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은 마음에서 태어난 시집입니다. 저는 이 언어의 손길이 그늘 속에 머무는 누군가의 손을 따뜻하게 잡아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좋은 시의 조건
좋은 시란 먼저 ‘그늘을 품은 언어’라고 믿습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말과 글이 넘쳐나지만, 시는 보이지 않는 것을 응시하고 들리지 않는 울음을 붙잡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시는 그래서 빛보다 그늘을, 소리보다 침묵을, 드러남보다 감추어짐을 향합니다. 시인은 그늘에 깃든 상흔을 더듬고 언어로 그 자리에 머무는 자입니다. 저는 언제나 그늘 속에서 온기를 찾는 시를 꿈꿔 왔습니다. 좋은 시는 상처 입은 자리에서 조용히 그러나 깊은 윤리적 책임으로 세상과 마주합니다. 좋은 시는 또한 ‘언어의 맨살’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에게 언어는 꾸미거나 부풀리는 수사학적 장식이 아닙니다. 단추 뒤의 구멍처럼 언어는 자신을 둘러싼 허물들을 벗겨 낼 때 가장 진실해집니다. 좋은 시는 그 언어의 맨살을 드러내며 읽는 이의 마음에 작은 흔적을 남깁니다. 그 흔적은 때로 슬픔의 결이 되기도 하고 존재론적 물음의 울림이 되기도 합니다. 좋은 시는 그런 언어의 결을 통해 독자 한 사람의 내면에 오래 머물 수 있는 시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저는 좋은 시가 ‘애도의 언어’이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는 늘 사라지는 존재들이 있습니다. 이름 없는 이들, 잊힌 이들, 부재로 남은 이들이 있습니다. 좋은 시는 그들을 대신해 한 줄의 숨결을 불어넣고 언어의 손으로 그들의 손을 잡아주는 시입니다. 저는 시인이란 결국 그 손을 잡기 위해 언어를 빌려 쓰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늘흔』을 비롯한 제 시들은 그 손길을 향해 나아가려는 조용한 애도의 몸짓입니다. 좋은 시는 그렇게 누군가의 그늘을 따뜻하게 감싸 안을 수 있는 시라고 저는 믿습니다. 무엇보다 좋은 시는 ‘자기 그늘과도 화해하는 시’이어야 합니다. 누군가 말했지요, ‘시인은 타인의 슬픔에 함께 울어주는 자’라고. 저는 한걸음 더 나아가, 시인은 타인의 상흔만을 더듬는 존재가 아니라, 그 슬픔과 상흔의 결을 따져 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시가 침묵과 그늘에서 태어난 작은 빛이며 ‘스스로를 겨누는 언어의 윤리’이기를 진정 바랍니다. 그렇게 태어난 시는 오래도록 독자의 마음에 스며들고 한 줄의 시구가 언젠가 누군가의 삶을 붙드는 언어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애착 시
열 손가락 깨물어 아프지 않은 것이 어찌 있겠습니까마는, 표제시인「그늘흔」에 우선 마음이 갑니다. 사전에 없는 신조어인 ‘그늘흔’은 시집 전체를 한 단어로, 한 장면으로 응축한 언어입니다. 이 시를 쓸 때 저는 언어로 붙잡을 수 없는 것들, 사라져 가는 것들 앞에서 가장 고독하고도 정직한 마음으로 시를 썼습니다. 여름이라는 계절에 실려 무너지고 멸망하는 존재들, 그늘 속에 쌓여 가는 상흔과 실패의 그림자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마지막까지 언어를 부여잡으려는 마음이 이 시에 담겨 있습니다. 저는 이 시가 시집 『그늘흔』이 말하고자 하는 윤리적 질문과 존재의 슬픔, 언어의 무력함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어를 건네려는 손길을 가장 온전히 보여 주었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이 시는 제게 가장 아프고도 사랑스러운, 시집의 심장 같은 작품입니다.
그늘혼
소포를 열자
여름이 들어 있었다
마지막 계절에 들어선 아이는 더 두꺼워졌을까
녹아 버렸을까
그림자 없는 소년과 그림자뿐인 소년이 서로를 발굴했다
한 겹씩 벗겨낼 때마다 소리를 질렀다
유물처럼 과거에 대해서만 말했다
그해,
두 입술은 더디게 지워졌고
쌍니은을 닮아 갔다
상처는 아무는 게 아니라 노을처럼 저무는 거라고
엎질러진 얼굴을 주워 담으며 우리는
서로에게 앞자리를 양보하듯 무릎을 꿇고서
얘들아, 더 투명해져야지
거울 깊숙이 울음을 파묻는 놀이
아이는 꼬리를 잘라 그늘을 살찌웠다
여름이라는 짐승, 그 서늘한 발작
여름에서 하나씩 버리면
어른이 되지
기다림이 어두울수록 끄트머리가 헐거워지는
그늘의 실패
그날,
절반의 피조물
더 진해진 여름이 멸망하고 있었다
-향후 계획
『그늘흔』이 서정적 리얼리즘 계열의 시집으로, 상흔과 애도의 윤리, 존재의 그늘을 언어로 더듬었던 작업이었다면, 앞으로 선보일 시집 『로보데우스』는 전혀 다른 시적 세계를 펼칠 계획입니다. 『로보데우스』는 마술적 모더니즘의 계보 안에서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허물고 기계와 인간, 사랑과 문명의 의미를 새롭게 묻는 시적 실험이 될 것입니다. 이 시집은 문명과 기술이 고도로 발전한 시대에 오히려 사랑과 인간성을 잃어가는 인류를 비추는 거울입니다. 『로보데우스』라는 제목은 로봇과 데우스(신)의 합성어로, 기계적 존재가 신적 존재로 치환되며 인간성의 경계가 붕괴되는 비극적 역설을 상징하는 신조어입니다. 이 시집의 시들은 파편화된 언어, 기묘한 이미지, 환상적 장치들을 통해 기술 문명에 잠식당한 인간의 초상을 그려냅니다. 꿈과도 같은 장면 속에서 기계와 사랑, 생명과 기호의 경계가 무너지고 독자는 그 속에서 불안과 경이의 감각을 동시에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늘흔』이 그늘 속 온기와 윤리적 질문을 담담히 응시했다면, 『로보데우스』는 훨씬 더 파격적이고 도발적인 언어로 독자와 마주할 것입니다. 시집은 각기 다른 얼굴을 지닌 로보데우스의 세계를 탐험하며, 그 속에서 사라져가는 사랑과 존재의 의미를 끈질기게 질문합니다. 저는 『로보데우스』를 통해 새로운 시적 차원을 탐험하고 독자 여러분께 낯설고도 치열한 언어의 세계로 초대하고자 합니다.
-뷰티라이프 독자께
《뷰티라이프》 독자 여러분, 반갑습니다. 시를 쓴다는 것은 저에게 세상의 그늘을 바라보고 그 안에 숨은 작은 아름다움을 더듬는 일입니다. 저는 시 속에서 사라지는 것들, 잊힌 것들, 상처 입은 것들의 흔적을 언어로 살피며 그늘 속 온기를 찾아왔습니다. 여러분이 아름다움을 가꾸듯, 저는 언어로 마음의 그늘을 어루만지려 합니다. 세상의 모든 빛에는 그늘이 있듯, 진정한 아름다움은 그늘과 빛이 함께 있기에 더욱 빛난다고 믿습니다. 시집 『그늘흔』이 여러분 마음속에 작은 위안과 깊은 사유의 시간으로 자리매김되길 소망합니다. 고맙습니다.
<뷰티라이프> 2025년 5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