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초대석(정한용 시인)
‘산문시’에서 얻는 새로움의 발굴,
『희망이라는 절망』 출간한 정한용 시인
-본인 소개 부탁합니다.
안녕하세요. 불러주셔서 영광입니다. 저는 충북 충주에서 났고요. 1980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평론 당선과 1985년 <시운동>에 시를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그간 시집으로 『유령들』, 『거짓말의 탄생』, 『천 년 동안 내리는 비』, 『희망이라는 절망』 등 여덟 권을 냈고요. 평론집으로 『지옥에 대한 두 개의 보고서』, 『울림과 들림』 등, 문학론/산문집으로 『초월의 시학』, 『따로/같이』 등을 출판했습니다. 영어 번역 시선집 『How to Make a Mink Coat』, 『Children of Fire』와, 스페인어 번역 시선집으로 『Registros de la experiencia humana』가 있습니다. 10여 년 전부터 그림을 그려, 지금까지 네 번 개인전을 열기도 했습니다.
-시집 <희망이라는 절망>을 소개하면?
이 시집은 가장 최근에 나온 저의 여덟 번째 시집입니다. 이 시집의 끝에는 다른 비평가의 ‘해설’ 대신 제가 ‘작가노트’라는 것을 써서 붙였습니다. 그 글에서 이번 시집의 의미를 나름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꽤 긴 글이어서 자세한 내용은 그 글로 대신하는 게 좋겠습니다. 다만 이번 시집이 여타의 다른 시집과 구별되는 특징 하나만 말씀드리고 싶군요. 이 시집을 읽으면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게 하나 있으셨다면, 수록 작품 전부가 산문시라는 것, 예, 그렇습니다. 잘 알다시피, 시는 행을 나눠 들쭉날쭉하게 쓰는 게 보통입니다. 물론 행을 나누지 않은 산문시도 낯설지는 않으실 텐데요, 그렇다고 이 시집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산문으로만 채운 경우는 흔치 않을 것 같습니다. 이 시집의 특징으로 가장 먼저 ‘산문시집’이라는 걸 내세우고 싶습니다.
-이번 시집을 내게 된 소감
이번 시집 이전에 제겐 일곱 권의 시집이 있습니다. 초기 네 권은 흔히 시인들이 그러하듯, 몇 년 쓴 작품을 그저 한곳에 모아 책을 냈습니다. 그러다 어떤 계기가 있어서, 시집 한 권을 하나의 테마로 ‘기획’하자는 아이디어가 떠올랐고, 잡은 주제가 ‘제노사이드’였습니다. 그래서 다섯 번째 시집 『유령들』은 인류 역사에서 피비린내 나는 대량학살 사건들로 채웠습니다. 시집 전체를 테마화하니 내가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선명하게 독자들에게 전달되더군요. 그래 이후 시집도 기획하게 되었는데, 여섯 번째 시집 『거짓말의 탄생』은 주제가 ‘판타지’였고요, 일곱 번째 시집 『천 년 동안 내리는 비』의 주제는 ‘미래문명’이었습니다. 이 세 권의 시집은 우리 역사에서 과거-현재-미래를 통괄하여, 인간이 어떻게 살았고, 어떤 존재이며, 어디로 가고 있는가, 하는 문제를 다루었다 하겠습니다. 이제 주제로 보면 제가 더 할 말은 없는 셈이었지요. 그래서 여덟 번째 시집을 어떻게 만들까, 고민이 많았습니다. 그러다 떠올린 게, 내용이 아닌 형식에서 새로움을 찾아보자 생각했고, 그때 떠오른 것이 ‘산문시’였습니다. 지난 몇 년간은 산문시에서 내가 어떤 새로움을 발굴해 낼 수 있을지 화두로 삼으며 글을 썼습니다.
-이번 시집을 읽으실 분들께 팁이 있다면?
이 질문에 대한 답도 이미 ‘작가노트’에서 언급했습니다. ‘왜 산문시집인가?’라는 질문으로 대신하면 빠를 듯합니다. 저는 요즘 시에서 운문과 산문의 경계가 꼭 필요한 게 아니라면, 산문화된 운문이나, 운문화된 산문이 가능할지, 이것을 실험하고 싶었습니다. 시를 쓰며 꼭 행을 갈라야 하나, (좀 다른 이야기이긴 한데) 꼭 마침표를 모조리 지워야 하나, (이것도 좀 할 말이 많은데) 꼭 시적인 상징이나 은유를 깔아야 하나, (이건 당연하다 여기실 것 같은데) 꼭 남들이 쓰는 대로 따라 써야 하나? 물론 이렇게 말씀드린다고 해서 제가 산문시에 대한 정답을 갖고 있는 건 아닙니다. 그런 생각들이 두서없이 머릿속에서 배회하는 모습을 망연히 바라보며, 나는 이 시집의 시를 썼습니다. 다행히 읽고 난 독자들께서, 일단 재미있고 색다른 생각거리를 제공해 준다고 평가해 주시니, 조금 보람을 느낍니다.
-애착이 가는 시 한 편 소개
모든 시인이 그렇겠지만, 이 시집에 실린 시는 저에겐 모두 애정이 가는 작품입니다. 어느 한 편만을 고르기가 정말 쉽지 않네요. 할 수 없이 시집의 표제작인 「희망이라는 절망」을 보여드리겠습니다.
“희망이 싸졌다. 십여 년 전부터 공급이 넘치기 시작하더니 가격이 폭락했다. 백화점 명품코너에서 VIP 고객에게만 밀거래하듯 판 적도 있었는데, 이젠 동네 마트에서도 쉽게 구할 수 있다고 했다. 들리는 말로는 희망을 생산하던 지식 엘리트들의 담합이 깨졌기 때문이라고도 하고, 방송에 나와 떠드는 자칭 전문가에 의하면 원래 효과가 미미한 것이었는데 드디어 소비자들에게 그 정체가 들통났기 때문이라고도 했다. 우리처럼 평생 희망이란 걸 사본 적 없는 보통 사람들이야 값이 오르든 내리든 상관이 없지만, 나는 어제 황당하기 그지없는 일을 겪었다. 그리스 여행을 다녀온 소평 씨가 선물이라고 준 상자를 열어보니, 거기에 상한 희망이 한 봉지 들어 있었다. 아마도 유효기간이 지났거나, 비행기로 오는 도중 탈이 난 듯했다. 준 이도 몰랐지 싶다. 속이 무르고 색깔이 변했는데, 우리나라 썩은 희망과 비슷해 보였다. 그냥 버려야 하나, 준 이를 생각해 잠시라도 보관해야 하나, 걱정으로 잠이 오지 않았다. 희망이 조금씩 조금씩 절망으로 변질돼 갔다. 세상 썩는 냄새가 고약했다.”
-앞으로의 계획
이번 시집의 초점은 산문시였으니, 다음 시집은 어떤 방향으로 써야 할지 고민입니다. 잠시 쉬면서 깊이 고민해 보겠습니다. 뭔가 새로운 게 있을까, 답을 구하기가 쉽지 않네요. 하여튼 평균 5년 주기로 시집을 냈는데, 두 번 정도는 더 출판하는 게 남은 생의 목표입니다. 흠, 그리고 글 쓰는 것 외에 제가 하는 일이 두 가지 더 있습니다. 하나는 그림을 그리는 것인데요, 작년에 전시회를 열었으니 2년쯤 지나 새 전시회를 열고 싶고, 그러자면 당분간 멈췄던 그림 그리기에 매달려야 하겠습니다. 또 다른 하나는 전자책 출판사에서 책을 만드는 것인데요, 이것도 일이 꽤 많습니다. 세상에 내 재능을 봉사로 돌려드리고 싶다는 마음에서 하는 일입니다. 돈을 벌지는 못하지만, 할 수 있는 날까진 계속해야겠지요.
-뷰티라이프 독자들께 한 마디
<뷰티라이프>는 이완근 국장께서 매번 보내주셔서 잘 보고 있습니다. 미용 전문지임에도 문학 관련 페이지를 비중 있게 실어주시는 것 보고 늘 감사한 마음입니다. 미용과 문학의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저는 감히, 이 둘은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예술’이라고 주장하고 싶습니다. 더불어 여러분도 그 숭고한 작업의 도반이라는 의미에서 깊은 애정을 느낍니다. 모두가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며 행복하시길 빕니다. 감사합니다.
<뷰티라이프> 2025년 5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