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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비에서-고운기-
글쓴이 : 뷰티라이프 날짜 : 2023-07-26 (수) 11:32 조회 : 1938
◆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121)

고비에서
고운기(1961~ )

  아주 잠잠한 날도
  병원 뒤쪽 언덕의 숲속 바위 턱에 가만 앉아 있으면
  바람이 나뭇잎 살랑이더군
  겨우 알아챌 만큼 실처럼 불어오더군

  내 더운 몸 식히러 우주가 움직이는 낌새
 
  수술을 마친 주치의가 말했어. 시뮬레이션해보니 5년 뒤 생존율 65%, 순간 작은 한숨을 들었는지 다시 젊은 의사는, 수치일 뿐이지만요, 급히 말을 고쳤어. 서로 약속한 듯 멋쩍게 미봉(彌縫). 5년 뒤, 그때 나는 65 아니면 35 어느 쪽에 들어 있을까.

  남은 수명 헤아려지니
  기다릴 일과 소용없는 일 가려지더군

  그러라고 바람이 살랑이며 실처럼 다가오는데
  나는 문득
  내 눈 안에 총명하게 발을 담가 다오,
  다짐하더군


고운기 시인
1961년 전남 보성군 출생. 연세대학교 대학원 국문학 박사. 한양대학교 문화컨텐츠학과 교수. 2007.04~2008.03 일본 메이지대학교 문학부 객원교수. 198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등단. 시집 『밀물 드는 가을 저녁 무렵』 『나는 이 거리의 문법을 모른다』 『구름의 이동속도』 『어쩌다 침착하게 예쁜 한국어』 등이 있다. <시힘> 동인.

◆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의 121번째 시는 고운기 시인의 “고비에서”입니다.

고비의 사전적 의미는 ‘어떤 일이 되어 가는 가장 중요한 단계나 국면’, ‘어떤 일이 되어 가는 데에서 매우 어려운 순간이나 국면’ 등으로 표현합니다. ‘절정’이나 ‘위기’ 등이 비슷한 뜻으로 쓰일 수 있겠지만 뉘앙스의 차이는 큽니다.

살아가노라면 “고비”를 맞게 되는 일이 종종 발생합니다. 그 고비를 어떻게 넘기느냐에 따라 인생의 성패가 좌우된다고 말들을 합니다. ‘위기(고비)가 기회’라는 말도 있습니다만 이런 말들은 사경을 헤매는 경험을 해보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사치일 뿐입니다.

죽음의 목전에서 느끼는 삶의 무게는 일상인들의 그것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형질임을 어렴풋이 짐작할 뿐입니다. 더구나 그것이 암(癌)이라면 더욱 그렇겠지요.

“내 더운 몸 식히러 우주가 움직이는 낌새”를 느꼈을 때의 공포는 아마 말로 표현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죽음의 공포를 이겨낼 수 있는 초월적인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꼭 종교의 힘이 아니더라도 이것은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의지의 산물이라고 여기고 싶습니다. 초월의지라고나 할까요.

이러한 의지 덕택으로 그리하여 “5년 뒤” “65 아니면 35”를 넘어 10년 뒤, 20년 뒤, 혹은 50년 뒤 생존율 100이라는 기적의 힘을 믿고 싶습니다. 아니 이것은 기적이 아니라 “고비”를 맞이하여 인간의 선한 의지가 실현할 수 있는 희망이며 약속입니다.

시의 힘이기도 합니다.
 
【이완근(시인, 본지 편집인대표 겸 편집국장)】
 <뷰티라이프> 2023년 8월호